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탑의 체험(Turmerlebnis)
액트성경연구원 편집부 엮음
1. 역사적 배경: 비텐베르크의 탑과 고뇌하는 교수
1) 시기와 장소: 이 사건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검은 수도원)에 거주하던 시절, 수도원 건물 남쪽에 위치한 탑의 2층 서재(따뜻한 방)에서 일어났습니다. 학자들은 이 시기를 루터가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강의를 하던 1515년에서 1519년 사이, 특히 1519년경으로 추정합니다.
2) 루터의 영적·육체적 상태 (안페퉁): 당시 루터는 안페퉁이라 불리는 극심한 영적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학 박사이자 성서학 교수였지만, 하나님을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닌 엄격한 재판관으로 인식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만성적인 변비와 치질 등 육체적인 질병으로도 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탑 안의 서재는 그가 육체적 고통과 영적 씨름을 동시에 감내하며 성경 연구에 몰두하던 치열한 전쟁터였습니다.
3) 신학적 난제: 중세 스콜라 신학(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기반)은 하나님의 의를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배적 정의로 가르쳤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죄인인 인간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이 정의의 하나님 앞에서 절망했고, 탑 속에 틀어박혀 바울 서신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2. 마르틴 루터의 고백: 탑의 체험 (전문 재구성)
(1545년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에 기록된 회심의 전모)
나는 그때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을 다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의를 마친 후라 자신이 있었고,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의 서두에 나오는 한 말씀이 나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장 17절)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가 문제였습니다. 나는 이 단어를 혐오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모든 박사들이 가르치던 관습적인 용법에 따라, 나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말하는 형식적 또는 능동적 정의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불의한 죄인들을 처벌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흠잡을 데 없는 수도사로서 엄격한 규율 속에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불안한 양심을 가진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나의 그 어떤 만족스러운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 의로우신 하나님, 죄인을 처벌하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나는 그분을 미워했습니다. 나는 신성모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속으로 격렬하게 투덜거리며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가련한 죄인들이 원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고, 십계명의 율법으로 온갖 재난을 당하는 것도 모자란단 말인가?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까지 고통에 고통을 더하시며, 그 복음 안에서조차 그분의 의와 진노를 들이대며 우리를 위협하신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거칠고 혼란스러운 양심으로 인해 미칠 듯이 괴로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끈질기게 그곳을 두드렸습니다. 바울이 도대체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기어코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목마른 짐승처럼 매달렸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마침내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말씀을 묵상하던 중, 이 구절의 문맥, 즉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연결 고리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말씀이 나에게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처벌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살게 되는 그 의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수동적 정의였습니다. 이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참된 의미였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다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 그 자체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즉시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내게 완전히 다른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이전에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던 단어들이 이제는 위로와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기억나는 성경 구절들을 머릿속으로 훑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단어들에서도 이와 같은 유비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 또한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영광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내게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증오스러운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단어는 내게 가장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단어가 되었습니다. 내게 있어 바울의 이 구절은 진정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습니다.
그 후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영과 문자에 관하여”를 읽었고, 거기서 그 역시 하나님의 의를 비슷하게 해석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이 믿음에 의한 전가를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임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나의 깨달음과 일치했습니다. 나는 이 힘을 입어 더욱더 깊이 성경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참고 문헌
Martin Luther, “Vorrede zum ersten Bande der Gesamtausgaben seiner lateinischen Schriften (1545),” 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54 (Weimar: Hermann Böhlaus Nachfolger, 1928), 18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