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엑트 사단법인 엑트

아브라함의 언약(言約)에 대한 소고

김성훈 목사(대전 은혜의복음교회)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모세의 자손으로 오셨다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 그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 복음을 준비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씨”와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심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아브라함의 의에는 아브라함이 지불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브라함의 의였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대로 받으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의롭게 된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의 믿음이 된다. 이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약속을 공증(公證)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언약식을 거행한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창세기 15:8~11)

아브라함은 자신이 받은 약속에 대한 증거를 요구했다. 하나님은 당시의 법적 제사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짐승의 제물을 반으로 쪼개서 준비하게 하였다. 조류는 쪼개지 않고 목을 비틀어 준비하게 하였다. 고대 근동에서 짐승을 쪼개고 비둘기의 목을 비틀고 그 사이를 사람이 지난다. 그 곳을 지난 사람은 목숨을 걸고 언약을 지켜야 했다.

제물을 반으로 정확히 자른다. 언약은 둘이 한편이고 하나임을 전제로 한다. 둘 중에 한편이 이 언약을 어기면 어긴 자는 짐승처럼 쪼개어 질 것이 약속된다. 언약에 참여한 양 편은 손을 잡고 쪼개진 제물 사이를 걷는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제물 사이를 지나야 했다. 이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본문에서 제물 사이를 지난 것은 하나님 한분이시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이 해야 될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이었다. 아브라함은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죽여 그 중간을 쪼갰다. 그 쪼갠 것들은 마주 대하여 놓였다. 쪼개진 제물들에게 피가 흘렀다. 해질 때에 아브라함은 깊이 잠이 들었다. 캄캄함이 임하여 아브라함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불이 제물 사이로 지나가셨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17)

아브라함은 그 제물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다. 하나님만 그 쪼개진 제물 사이를 지나셨다. 그것은 하나님만 그 언약을 이행할 의무를 지신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확고하고 일방적인 언약이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만 지나가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이 언약을 지킬 의무가 없다. 하나님만 이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아브라함 편에서는 준행의 의무나 조건은 없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갖추거나 이루어야 할 아무것도 없었다. 아브라함이 누구이든 무슨 형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언약을 이행해야 할 모든 의무는 하나님께 있었다. 모든 언약의 수혜자는 아브라함이 된다. 그는 단순히 믿고 누리기만 하면 된다. 아브라함의 능력이나 상태나 모습이나 행위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이 언약을 반드시 지키셔야 했다. 아브라함은 다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주시고 그 후사에서 그리스도가 나실 것을 믿기만 하면 되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아브라함은 믿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믿지 않으려고 해도 이삭이 사라를 통하여 잉태 하였을 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브리서 6:13~1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진실로 자신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믿음도 주고 약속도 이루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 (창세기 13:15)

“자손”은 단수다. 많은 자식들이 아니다. 이삭은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바울에게 이 자손은 곧 그리스도였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라디아서 3: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라고 한 말씀은 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셨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세기 15:18)

처음에 이 땅이 어디인지 무엇인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 땅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동생이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었다. 아브라함의 아내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여자였다. 이러한 형편의 어려움 가운데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조카 롯은 아브라함과 동행했다. 가뭄이 심하게 가나안에 임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내를 판값으로 부자가 되었다. 불의한 물질이 가정에 들어오고 롯의 종들과 아브라함의 종들 간에 큰 다툼이 일어났다. 아들과 같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다. 드디어 “친족”으로부터 완전히 아브라함은 벗어났다. 아브라함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지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세기 13:14~15)

드디어 약속의 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유업(遺業)이란 곧 영원한 소유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다. 율법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이미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430년이 지난 후에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땅은 율법이 내려오기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은혜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업(遺業)”은 결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율법의 행위나 인간적인 수고나 선행 또는 인간의 열심이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3:18)

율법을 행한 삯으로 유업이 주어진다면 그 유업은 은혜일 수가 없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11:6)

이에 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일방적인 약속이 아니라 쌍방간의 언약이다. 율법은 내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 내 쪽에서의 의무는 순종이다. 하나님 쪽에서의 의무는 “복을 주시는 일”이다. 율법은 양쪽이 다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약속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은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은혜에 기인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약속도 일방적인 약속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복음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서 3:8)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으로 자신의 한계와 조건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게 하였다. 복음도 이와 같다. 장차 그리스도가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신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일방적으로 이루신다는 은혜의 약속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후사에서 나셨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이 오심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불신자와 영원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의 마음에 오심이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한복음 8:56)

유대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8:57~58)

자신의 조건으로 하나님께 서려는 자들이 유대인이었다. 이들에게 믿음도 조건이었다. 믿음은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을 지켜 주셨을 때 믿어짐이다. 의지적으로 믿으려는 마음은 율법이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약속이었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말씀을 듣는 위치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아브라함이 어떤 선한 일을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우신 약속이었다. 이 언약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약속은 그 후에 모세와 세우신 언약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출애굽기 19:5)

이 언약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순종이 선행되어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과는 달라서 조건적인 언약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명기 28:1~2)

이스라엘이 모든 백성들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되고 하나님께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준행해야 했다. 율법의 준행 여부에 따른 결과는 신명기 28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율법을 지켰을 때 하신 축복의 약속은 28장 14절까지다. 율법을 어겼을 때 받는 저주와 형벌에 대해서는 28장 54절 이후 기록되어 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한 쪽 당사자는 하나님이시다. 다른 당사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그러나 율법 조항의 하나라도, 한번이라도 지키지 못하면 율법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 아니 누구도 육체를 가진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래로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시내산에서부터 율법을 받은 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못 박아 죽이기까지 약 1500년 간 불신과 패역의 연속이었다. 단 한 사람도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

은혜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를 보낼 준비를 하고 계셨다. 메시아를 통해 그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구원함이 복음의 약속이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3:17)

아브라함이 받은 복음이 율법보다 먼저 왔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선물이었다. 그것은 어떤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선물이었다.

또한 율법을 지키지 못했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였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전한 행위를 요구했다. 아무도 그 행위로는 완전해질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은혜와 믿음밖에 길이 없다.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는 속량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약속이다. 곧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신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에 따른 죽음이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서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셔야 했다. 아브라함의 모든 조건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 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맡은 역할이 있다. 율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율법은 확대경처럼 우리 죄를 극대화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 위해 율법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죄 아래에 가두게 하셨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의 역할은 끝났으며 이제는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

모세의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폐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회할 일을 하신 셈이 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민수기 23:19)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경우에도 폐하거나 더해지지 않는다. 율법이 내려와도 그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유효하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여전히 살아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율법이 더 오래되었고 따라서 모세의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은혜의 복음보다 더 권위를 갖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면서 천하 만민에게 복(福)을 가져다 줄 “아브라함의 씨”인 그리스도에 대해 하신 언약이 율법보다 430년이나 먼저 있었다고 증거한다. 이 언약을 세우신 후에 발생하는 그 어떤 일도 언약을 변경시키거나 무효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인간의 열심이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이다. 결코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서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분발하여 경건해졌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유업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로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았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은혜이지 우리의 공로에 달려 있지 않다. 이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받은 유업(遺業)을 통해 증명되었다.

창세기 15장에서 짐승을 잡아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이었다. 구약 시대에 언약을 세울 때는 반드시 짐승을 잡아서 죽여야 했다. 짐승의 피 흘림과 죽음을 통하여 제물이 죽으면 언약이 세워지고 성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약속에 따른 제사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언약의 제물로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새 언약을 이루시는 제사로서의 죽음이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긴 것이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시편 50:5)

하나님은 인간의 경건함, 깨끗함, 반듯함, 신실함, 충성됨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조건적인 분이 아니다. 율법의 행위나 선행이나 인간의 공로로는 온전케 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이나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 우리 모든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들에게도 복을 주신다. 이것이 은혜다. 은혜는 부모가 자녀에게 주고 싶은 세계였다. 하나님은 참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보여주고 증명한 것이 십자가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성취되었다. 이제 구약은 그림자와 예표로 오실 그리스도로 우리를 인도할 뿐이다. 이제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은혜의 새 언약은 율법의 의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보다 훨씬 강력하고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강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를 없애고 우리를 영원히 의롭게 깨끗하게 온전하게 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으니” (히브리서 9:26)

← 목록으로